6월 4일 연중 제9주간 목요일
오늘 복음에서 율법 학자 한 사람이 예수님께 다가옵니다. 이 사람은 바리
사이와 헤로데 당원, 사두가이들과 달랐습니다. 그는 적대감을 가지는 대
신 존중하며 경청하는 마음으로 예수님께 다가옵니다. 마르코 복음사가
는 이 모습을 “토론하는 것을 듣고 있다가 예수님께서 대답을 잘하시는 것
을 보고 그분께 다가와”(마르 12.28)라고 묘사합니다. “듣고”, “보고”, “다가
와”라는 동사를 잇따라 쓰며, 인간이 진리 앞에서 천천히 마음을 여는
장면을 보여 준 것입니다.
그의 질문은 단순한 호기심이 아닙니다. 라삐들이 613개의 계명을 ‘무
거운 것'과 ‘가벼운 것’으로 나누어 논쟁하던 시대, 그는 율버 전체를 떠받
치는 중심을 묻습니다. 무엇을 붙들어야 삶이 무너지지 않는지, 무엇이 하
느님께 이르는 길인지 묻습니다.
예수님께서는 하나의 계명만으로 답하시지 않습니다, 먼저 신명기 6장
4절의 고백을 꺼내십니다. “이스라엘아 들어라 주 우리 하느님은 한 분이
신 주님이시다”(마르 12.29). 하느님께서는 한 분이시라면, 사랑도 둘로 갈라질
수 없습니다.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마음과 목숨과 정신과 힘, 인간의 온 존
재를 다하여 하느님을 사랑하라고 말씀하십니다. 이것은 삶의 방향의 문제
입니다. 하느님께 삶 전체를 돌려놓는 회개입니다.
그리고 이어서 레위기 19장 18절을 가져와 말씀하십니다. “네 이웃을
너 자신처럼 사랑해야 한다”(12.31). 여기서 사랑은 단순한 선행이 아니라,
하느님을 향한 사랑이 반드시 인간을 향한 책임으로 ‘다시 번역되어야’한
다는 선언입니다. 하느님 사랑은 결국 형제적 관계의 회복으로 드러납니다.
이에 율법 학자는 더 나아가 이 사랑이 “모든 번제물과 희생제물보다
낫습니다.”(12.33)라고 고백하며, 성전의 제도보다 더 깊고 넓은 곳에 있는
하느님의 뜻을 짚어 냅시다. 예수님께서는 그에게 말씀하십니다. “너는 하
느님의 나라에서 멀리 있지 않다”(12.34), 아직 문턱이지만, 이미 빛은 그 사
람 언에 들어와 있습니다. 사랑은 그 빛이 머무는 자리입니다. 사랑은 하나
의 제도와 그 제도가 만들어 놓은 숱한 형식 안에 갇혀 있지 않습니다. 진
정한 율법은 제도와 사상과 규범에 갇히지 않고, 그것을 넘어선 곳에서 완
성을 아루어 냅니다.. ⊕
(매일 미사 오늘의 묵상 필사)

